실제로 세령 공주는 역사 속에서 세희 공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승유는 역사 기록에서는 김종서의 셋째 아들로, 승정원 주서(注書)를 지내다가 계유정난으로 은둔했다고 남아져있습니다.
김승유는 드라마에서는 부마도위에 오를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기록이 빈약하며 중요성이 떨어지는 인물로 판단됩니다.
또 드라마에서는 수양대군의 딸인 '이세령'과 연이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계유정난 이전에 이미 혼인을 한 상태이며 공주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야사에서는 수양대군의 딸과 연이 있는 사람이 김승유가 아닌 김종서의 손자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역사를 따르기는 하나, 재미를 위해 편집된 부분이 많습니다.
아래는 공주의 남자의 원작으로 알려진 [금계필담]에 대한 첨부글과 세령공주에 대한 전설 [보굴암]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두었습니다.
금계필담
1873년(고종 10)에 서유영(徐有英)이 저술한 문헌설화집으로, 141편의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 한문필사본이다. 내용2권 2책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저자는 서문에서 말하기를, 말년에 외로움을 느껴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자 심심풀이(破寂之資)가 될 수 있도록 이 책을 쓴다고 적어놓았다.
고려대학교본은 원작을 지은 지 두 달 뒤에 저자가 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책은 각 편의 주인공의 신분과 시대순에 따라 작품들을 수록하는 체재로 되어 있다. 각 인물은 대체로 시대순으로 배열했는데,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 걸쳐 있으며, 작품에서 다룬 주인공들은 하층인보다 상층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보다 현실에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인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에 많이 나오게 된 야담집들과는 달리 다른 문헌을 참고하지 않고, 저자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만을 수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한문유인본(漢文油印本) 2책, 서울대학교 상백문고(想白文庫)에 한문필사본 1책,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한문필사본 2책 중 1책의 낙질본이 있다.
보굴암에 얽힌 전설
조선 초기 세조가 친조카인 단종을 멀리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키려할 때에 이의 옳지 못함을 직간하던 사람 중의 한 분 바로 세조의 공주였다. 공주는 부왕에게 단종을 유배하는 것은 왕가의 폐도라 왕좌를 보존시킴이 하늘이 바라는 순리라고 간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크게 노하여 한낱 아녀자인 공주가 주제넘게 국사에 관여하여 도리어 일을 그르친다고 죽이려 하였다. 왕비는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알고, 남의 이목을 피하여 노비와 함께 많은 금자를 내주어 야간 도주케 하며 이르기를 "공주는 이제 왕실의 자손이 아니니, 어느곳에 가서 살던지 신분을 숨기고 평민이 되어 부디 몸조심하며 편히 잘 살아라"하였다. 공주가 눈물로 하직하고, 성문을 빠져 나오니 그저 암담할 뿐으로 달리 묘책이 없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공주가 송림이 울창한 심산 유곡인 지금의 옥양동에 이르자 마침내 날이 저물어 숙소를 찾게 되었다. 마침 멀리 불빛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보니 보굴암 입구의 초막에서 나온 불빛이었다. 하룻밤만 유하려고 주인을 찾으니 초막에서 나온 주인이 엄두리 총각이라 공주는 차마 말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여러날의 노독을 이야기하였다. 총각도 처음에는 낯선 규수의 유숙을 거절하다가 딱한 공주의 사정을 듣고서는 자기 방을 비워 주었다. 공주는 총각이 부엌에서 잠을 자겠다는 소리에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노비와 의논하여 총각과 평생가약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튿날 공주는 총각에게 피차 팔자가 기박한 사람끼리 이왕에 이렇게 만났으니 성혼하여 부부가 됨이 어떠하냐고 의중을 물었다. 총각 역시 공주의 언행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마음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분을 속이고 평민이 된 공주는 보굴암 밑 초막에서 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장남이 출생하게 되자, 공주는 농밑 깊숙히 넣어 두었던 금자를 꺼내 놓으며 남편에게 자신의 신분과 그동안 감춰야만 했던 내력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원수를 다리 위에서 만나 자식까지 낳았으니 이일을 어찌하리요 하며 탄식하였다. 그는 바로 김종서의 친손자로서 환란 당시 구사일생으로 집을 빠져나와 이 심산 궁곡에서 은신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은신하여 살던 그 부부는 가진 돈을 생자로 하여 보은 내속리면 사내리로 이사하여 수년을 살던 중 마침 세조께서 득병하여 속리산에 요양차 입산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들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후 세조왕의 행차가 지나감을 보고, 북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통곡하였다.
세조가 지나다 보니 웬 아낙이 길가에 엎드려 슬피 우는지라, 가까이 불러 그 연유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아낙은 몇해전 자신이 죽이려 했던 그 공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되었던 세조는 늘 공주의 일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몹시 기뻐하며 공주의 결혼생활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종서의 후손은 끊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옥양석교 밑을 흘러 이루어진 옥양폭포를 앞에 두고, 천장 절벽이 만든 보굴은 그 당시 공주부부가 명명한 것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