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숙적, 수양대군과 김종서 |
이세령과 김승유는 조선 고종 시절 서유영의 《금계필담》에 등장하는 '수양대군 딸 세희와 김종서의 손자의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된 인물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음력 10월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유정난이라 한다.
김종서
김종서(金宗瑞, 1383년 ~ 1453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명장이다.
김종서는 흔히 무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다. 그의 6진 개척을 통한 북방 경영이 워낙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에 문인이 아닌 무인이라는 오해가 생겼다. 조선 초까지는 조선의 북방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김종서는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후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죽었는데, 단종을 잘 보호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정치적 야심이 큰 수양대군을 의식해서 그런 말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해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보필했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유명을 받들어 좌의정으로서 황보인·정분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를 획책하려는 야망을 품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중에 보낸 자객들에게 철퇴를 맞고 심한 부상을 입고 며느리의 친정집으로 피신했으나, 양정과 이홍심 등에게 발각되어 목이 잘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거사 다음날 아침에 자신의 아들인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인, 조극관, 민신, 이양 등과 함께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시(梟示)되었다.그의 죽음으로 인한 여파는 매우 커서, 그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이 김종서의 죽음은 물론이고, 조정에서 자신이 김종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파직하고 박호문을 도절제사로 임명해 함길도로 보낸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 박호문의 목을 잘라 대금황제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고, 이는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746년, 영조 때 신원되어 누명을 벗었다.
후대인 1678년(숙종 4)에 그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에 있다.
수양대군(세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서, 문종의 동복동생이자 안평대군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기도 하다. 즉위전 호칭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초봉은 진평대군(晉平大君)이었으나 여러차례 개봉된 끝에 수양대군이 되었다.
수양대군은 박식하고,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
그는 보통의 왕자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종의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후사도 나이가 어렸다. 세종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문종은 부왕보다도 더 병약하여 일찍 사망할 우려도 있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고 세종의 뜻은 부분적으로 성공하였다. 세종은 또, 자신이 일찍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
1450년 부왕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은 문종 이향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다. 그때 김종서나 황보인 등의 신하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왕실과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안평대군 계열에서 왕권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자 수양대군 역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어 정인지·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고 홍윤성·홍달손 등을 통해 병력을 모은 뒤 문종의 고명(誥命)으로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안평대군을 탄핵하여 사형시킨 뒤, 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 음력 6월에는 결국 단종을 강제적으로 상왕으로 올려 왕위에서 밀어냄으로써 조선의 새로운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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